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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 양귀자 | 30년이 지나도 여전히 센세이셔널한 강민주, 그 통쾌함과 씁쓸함
    문화생활/책 2024. 7. 8. 0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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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아직도) 소망한다 내게 (아직도) 금지된 것을

     

    앞서 간 페미니즘 소설들을 읽을 때면 항상 세월을 무색하게 하는 시의성에 놀라게 된다. 그럴 때면 첫째, 작가들의 통찰력에 감탄하기도 하지만, 둘째, 놀랍도록 더딘 변화에 무기력함을 느끼기도 한다. 

     

    1992년에 출간된 이 책도, 심지어는 1929년에 출간된 <자기만의 방>조차도 2024년의 현실을 아프게 꼬집고 있다. 

    비록 그 덕에 저자들은 천재라고 경탄받고 있으나, 이는 그들이 원한 바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예견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왠지 30년 후에도, 100년 뒤에도 이 책들이 시의성을 잃지 않을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지금 이 책이 출간된다면 달라졌을 만한 부분은, 강민주가 백승하를 납치, 감금하고 경찰의 추적을 따돌리는 데 훨씬 더 치밀한 계획과 조심성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점 정도?

    그러나 강민주는 어떻게든 해냈을 것이다. 강민주는 초월적 존재이니까. 

     

     

    강민주는 정말, 자아가 비대하고, 오만하고,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고, 모든 것을 수단으로 생각하고 다룬다. 

    내가 견디기 힘들어하는 특징을 두루 갖추고 있으나(그래서 처음엔 실제로 좀 힘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왠지 강민주를 응원하게 된다. 

    백승하의 말마따나, 강민주는 정말로 매력적인 사람인 것이다. (까와 빠를 모두 미치게 하는 스타성)

    강민주가 소설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초월적 존재라는 것이 못내 아쉽기까지 하다. 

     

    사실 이러한 특징들은 남성 캐릭터에서는 흔히 볼 수 있었던 것들이다. 

    굳이 이런 도발적인 소설이 아니라도, 남성 캐릭터들은 여기저기서, 하물며 안방 로맨스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으로서도 거리낌 없이 자신의 오만함과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태도, 다른 이들의 위에 군림하는 자세 등을 뽐내왔다. 

    (개인적으로는 '일본에 <데스노트>의 키라가 있다면, 한국에는 강민주가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키라는 강민주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뜬금없이 강민주가 교사가 된다면 애들을 끝내주게 잘 다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동학대..로 고발당할 위험이 다소 있겠으나.. 강민주라면 그것마저 잘 피해갈 듯.

     

    강민주의 변화로 인해 실망한 이들이 많은 것으로 안다. 

    강민주가 신의 영역에서 인간의 영역으로 내려오는 부분이긴 하다. 

    혹자는 오래된 여성주의 문학의 시대적 한계라고 할 수도 있고, 혹자는 '역시 여자는 남자를 못 잃는구나' 하고 느낄 수도 있다. 

     

    난 어느 쪽인가 하면, 역시 강민주가 끝까지 '강민주답게' 밀어붙이지 못하고 인간의 영역으로 내려온 것은 아쉽긴 하나, 연극의 절정에서 정말 '극적으로' 죽었다는 점에서 실로 '주인공다운' 죽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래도 강민주가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평행세계의 결말이 궁금하긴 하다. 

    (작가의 말을 보니 작가는 그럴 마음이 추호도 없었던 듯하긴 하지만)

    "이 소설은 말하자면 상처들로 무늬를 이룬 하나의 커다란 사진이다. 함께 들여다보면서, 서로 대립하지 않고, 각자 동등한 자리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길을 모색하는 데 유용하게 쓰여야 할 사진이다. 강민주의 테러가 잔인한 보복으로 끝나지 않고 가슴 더운 인간의 길로 접어든 것도 그 때문이다.
    나는 가능하면 이 소설이 여성소설의 범주에서만 읽히지 않고 세상의 온갖 불합리와 유형무형의 폭력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에게 함께 읽히기를 감히 소망한다. 그것이 삶을 대하는 진정한 예의라고 믿는다. (작가의 말)"

     

     

    백승하는 스윗남의 표본이다.

    백승하도 어찌 보면 강민주에 버금가는 소설적 인물이라고 느껴졌던 게, 털어서 먼지가 안 나왔다는 점. 비현실적이다. 

    그래서인지 양귀자는 백승하의 현실적 면모도 내어준다. 

    "그는 이 땅의 많은 여자에게 일어나는 불행과 고통에는 적극적으로 공감하지만 여성차별의 역사와 지배구조의 악의성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특히 현대에 이르러서는 모든 남성이 여성차별에 가담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변했다. 단지 개개인의 성격 차이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하여 사회를 분열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도 했다. (233p)"

    이 구절을 읽을 때는 작품의 재미와는 별개로 하품이 나올 뻔했다. 2020년대의 어디선가 너무 많이 들어본 대사라.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백승하의 '스윗남' 캐릭터성의 완성이다.

    강민주의 참을성, 혹은 백승하에 대한 '우호적인 감정'이 얼마나 깊었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강민주가 '또 한 차례의 린치'를 참은 것을 보면.

     

    인물들은 모두 저마다의 불행을 안고 있지만, 내가 가장 불쌍하게 여겼던 것은 백승하의 어린 시절 이야기 속 등장하는 '노랑이 아줌마'였다. 

    아무리 자본주의 논리니, 자기가 선택한 결과니 떠들어대도, 정말이지 아닌 건 아닌 거다.

     

    노랑이 아줌마를 향한 2차 가해도 너무나 현실성이 있어서 슬펐다. 

    강민주, 백승하는 소설적 존재일지라도 노랑이 아줌마는 현실적 존재이다.

    현실에서도 성매매 여성들은 많은 범죄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피해자성을 의심받는다. 

    성매매가 범죄라고 해서 성매매를 저지른 여성에게 저지른 범죄가 범죄가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미군놈한테도 강민주가 강림했어야 하는데.

    동시에 현실의 '노랑이 아줌마'들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못 하면서 소설적 구원만을 바라는 스스로의 무력함이 씁쓸하기도 하다. 

     

     

    황남기는 단순해보이지만 어쩌면 강민주보다도 더 복잡한 인물이다. 

     

    굳이 일축하자면 순애보남. 자기 딴에는 가슴 절절 끓는 금지된 사랑을 하고 있지만 결국은 '사랑하는 그녀'를 위한답시고 죽여버리는.

    "이것이야말로 제가 한 일 중에서 유일하게 선생님께 칭찬 들을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지만, 선생님이 원했던 최후는 틀림없이 그런 것이었다고 저는 믿습니다."
    "선생님이 제 삶의 이유라는 것 때문에 저는 선생님을 죽일 결심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지금 자신도 원하지 않는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길이 얼마나 힘든 길인가를 저만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고통은 저 하나로 족합니다. ···저의 소중한 선생님을 추악하고 흉측한 세상으로 내보내다니, 그것은 절대 안 될 일이었습니다."

     

    황남기가 강민주를 죽인 것을 두고 '강민주가 남성연대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막은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던데, 글쎄올시다.

    그렇다고 강민주를 죽여?

     

    개는 주인을 물지 않는다. 

    생각은 강민주의 몫이지, 황남기의 몫이 아니다.

     

    너는, "그래도 선생님에 대해 말할 기회를 가진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이 얼마나 특별한 존재였는지에 대해 이만큼밖에 말하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가는 것이 조금 아쉬울 뿐, 제 마음은 아주 편안합니다."라고 말하지만, 

    네가 죽이지만 않았다면 강민주가 그 자리에서 직접 자신의 특별함을 말할 수도 있었다.

     

    '선생님이 다 옳습니다요, 선생님만이 진리이고 빛입니다요,' 하다가도 결국은 '내가 선생님을 위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 하며 선생님의 의견은 물어보지도 않고 죽여버리는 남자. 극적이지만 어떻게 보면 현실반영적이기도 하다.

     

     

    김인수 너는 그냥.. 말 걸지 마라, 좀.

     

    불굴의 의지, 포기를 모르는 집념, 열정, 구애 따위로 포장되기에는 너무나도 그냥 스토커다.

    하지만 작품적으로는 강민주의 캐릭터성을 드러내는 조연 정도로 스쳐지나갈 수도 있었던 인물을 결정적인 키로 활용한 것이 좋았다. 

     

     

    정리하자면 강민주와 스윗남 및 순애보남의 이야기. 근데 이제 스토커남을 약간 곁들인..


    그 외 인상적인 부분 발췌

     

    "하기야 올해부터 시행되는 개정민법 이전에는 이런 경우 아내는 빈손으로 이혼당해야 했다. 부부의 재산분할권이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부가 가사노동에만 종사했다 하더라도 공등의 재산 축적에 기여한 것이 분명한데 그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마치 지금 상담 중인 여자의 남편과 똑같은 태도를 우리가 '법'이라 부르는 것이 취하고 있었다."

     

    강민주가 신문사에 뿌린 편지 전문

    그러나 그를 다 옮길 순 없으므로

    "다 자란 성인 남자를 교육하는 방법이야 그저 한 가지뿐이지요. 저도 별수 없이 그 한 가지 방법을 사용합니다. ···우리 속담에는 북어와 같은 급수를 굳이 여자라는 성에 한정 짓고 있습니다. 다만, 사흘에 한 번은 두들겨 패야 다소곳하다는 점에서는 남자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저는 이번에 확인하였답니다."

     

    "백승하는 이토록이나 인간적인 품성을 지닌 보호자 아래 있습니다. 저보다 훨씬 악독한 부류도 많다는 점을 상기하면 백승하에겐 이만저만한 행운이 아닌 셈이지요. 그러나 백승하 본인은 이것이 행운인지 불행인지 식별할 능력이 없습니다."

    "오히려 너무 뛰어난 머리의 남자는 더불어 즐기기에 성가신 게 한둘이 아닙니다. 남자가 많이 알면 얼마나 많이 알겠습니까. 바깥일은 저 혼자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저는 그저 잘생기거나 부드러운 남자면 족합니다
    ···"

     


    그 외 잡다한 감상

     

    - 하루키의 책을 읽으면 비틀즈가 듣고 싶어지듯(사실 그런 적은 없었다), 강민주를 읽으면 조지 윈스턴을 듣고 싶어진다.

    - 상담소 전화 하나하나, 정말 주옥같다.

    - 재력, 지성, 무술, 연기력, 주위 사람을 끌어들이는 마성까지. 강민주야말로 먼치킨. 신의 자식에게 고작 먼치킨이라고 하면 불경한가.

    - 어릴 적 <괴도 루팡>을 아껴 읽던 강민주 어린이가 자라 루팡 뺨치는 변장술을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 이제 보니 영화화되기도 했다! 무려 최진실 배우 주연. 고 최진실 씨가 강민주 역을 맡았다니 왠지 좀 먹먹하다.

    '최진실이 한국 영화 발전을 위해서, 주인공 강민주 역에 대한 애착으로 억대 출연료를 제작비로 투자하였다'는 말을 보니 더.. (출처: 나무위키, 연합뉴스 https://v.daum.net/v/19930927140700132)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을 때, 지속되는 삶의 궤도 위에서 온 힘을 다해 커브를 도는 일은 누구에게나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 소설이 커브를 결심한 모든 이에게, 잠시라도 힘이 되었길 바란다.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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